트럼프 대 트럼프

솔직히 국정연설은 좀 지루하다. 대통령이 새해의 로드맵을 선보이는 중요한 행사이지만 핵심내용은 대부분 미리 공개되니 새로울 것이 없다. 30일 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첫 국정연설도 다르지 않았다. 경제회복과 대규모 감세안 통과의 실적 과시에서 이민개혁과 기간시설 확충 등 주요 입법과제 제시, ‘강한 미국·미국 우선’의 국제정책 재천명에 이르기까지 거듭 들어 온 사안이니 새삼 궁금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눈길을 끄는 관전 포인트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지난주부터 미 언론들이 쏟아놓은 다양한 관전 포인트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어떤 트럼프가 등장할 것인가 – 호전적인 ‘트위터 트럼프’일까, 대통령다운 ‘프롬프터 트럼프’일까.

둘째, 취임 전부터 트럼프 백악관을 뒤덮어 온 러시아 스캔들 수사에 관해 언급할 것인가 – 트럼프 미래의 최대 변수는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의 수사 결과다. 2016년 대선의 러시아 개입과 트럼프 캠페인 팀의 공모 및 트럼프의 사법방해 가능성을 조사하고 있는 특검의 수사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듯 보이는 위기에 처한 트럼프가 국정연설이라는 강력한 연단을 반격의 기회로 사용할까, 자제할까.

분명한 대답이 가능한 두 번째 관전 포인트부터 짚어본다. 러시아 스캔들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트럼프보다 더 긴박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국정연설을 했던 전임 두 대통령의 ‘그 후’가 참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1974년 워터게이트 수사에 시달리던 리처드 닉슨은 국정연설에서 수사중단을 촉구하며 선언했다 : “1년의 워터게이트로 충분하다. 난 미 국민이 선출해준 이 직책에서 걸어 나갈 의사가 없음을 여러분이 알아주길 바란다” 그는 7개월 후 사임해야 했다.

빌 클린턴은 자신의 탄핵재판이 상원에서 진행 중이던 1991년 초에 행한 국정연설에서 문제가 된 섹스 스캔들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얼마 후 상원은 그의 탄핵안을 부결시켰고 클린턴은 다음해 재선에 성공했다.

클린턴의 전례를 따른 트럼프의 앞날도 장밋빛이 될 수 있을까. 30일 밤 트럼프를 향한 공화당 의원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보면 공화당이 다수당을 유지하는 한, 트럼프가 지금처럼 보수정책을 충실히 정착시켜가고 있는 한, 차기 대선까지 그의 생존은 보장될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 특검수사가 어떻게 이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것 또한 사실이다.

특검수사가 점점 더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위기, 갈수록 심해지는 의회의 분열, 바닥을 친 지지율, 다가오는 중간선거 등에 직면한 트럼프는 첫 국정연설을 반전의 계기로 활용하는 전략적 선택을 했다고 폴리티코는 백악관 참모 3명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지난해 2월 처음으로 “대통령답다”는 찬사를 이끌어낸 첫 의회연설의 성공을 재연하기 위해 ‘보다 전통적인 연설문’을 작성하라고 담당자들에게 지시했고 12월에 초고를 읽은 후 한 달 이상 고치고 또 고쳤으며 ‘합리적이고 초당적인 톤’을 위해 리허설도 여러 차례 했다.

당연히 두 번째 관전 포인트의 대답은 원고에 충실한 ‘프롬프터 트럼프’였다. 취임연설에서 암울했던 “미국의 살육”은 사라지고 첫 의회연설에서 찬사를 받았던 낙관적 어조가 되살아났다. “하나가 된 팀, 하나가 된 국민, 하나가 된 미국가족”을 제안하면서 회의적인 여론과 회의적인 의회를 향해 자신이 분열된 나라를 단합시킬 수 있는 안정된 리더임을 확신시키려고 노력했다.

‘트위터 트럼프’의 그림자가 전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이민’ 관련 언급이 특히 그랬다.

다음 주 정부 셧다운 위기와 맞물려 있는 이민 협상은 현재 워싱턴에서 가장 시급한 처리사안이다. 이번 국정연설이 교착상태를 거듭해온 이민문제 해결의 모멘텀이 되어주기 바라는 기대도 컸었다. 그러나 80분의 긴 국정연설이 끝난 순간 원점으로 되돌아간 듯한 허탈감은 이민자들만의 느낌이 아니었을 것이다.

180만명 드리머들의 시민권 허용을 포함한 4대 기본 축을 제시한 이민정책은 대체로 피상적인 다른 항목에 비해 트럼프가 가장 구체적으로 공을 들인 부분이다. 그러나 이민사회의 기반인 가족이민 폐지, 거액의 장벽 건설 기금 등 용납하기 힘든 조건에 더해 이민자들의 범죄에 대한 불길한 경고는 양당의 타협을 촉구하는 그의 ‘화합’ 어조를 압도하는 듯 했다.

공화당 의원들의 박수갈채 속에 초당적 단합을 호소한 이날 밤 트럼프의 국정연설엔 ‘가짜뉴스’ 공격도 없었고 미숙한 허풍도, 거친 모욕도, 노골적 인종 언급도 없었다. 대규모 감세안 입법화에서 경제회복, 법원의 보수화까지 그의 자화자찬도 ‘맥락이 다를 수’는 있지만 사실에 근거했다.

긍정적 평가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난해 첫 의회연설처럼 ‘초당적’ 찬사를 얻지는 못했다. 말로는 단합을 호소하면서 실제론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해 의회연설 때 “사소한 싸움의 시간은 지났다”며 약속했던 트럼프의 ‘새로운 날’에 대한 희망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를 지난 11개월 동안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단합을 추구하지만 모든 게 너무 늦었다”고 블룸버그 뉴스는 지적한다. 그러나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이다. 앞으로 3년, 국정연설에서 말한 것을 행동에 옮길 수 있다면, 옮기려고 진지하게 노력이라도 한다면, 트럼프는 ‘모든 미국인의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트럼프 대 트럼프의 대결에서 ‘프롬프터 트럼프’가 ‘트위터 트럼프’를 이겨야하는데…지금까지 우리에게 비쳐 진 트럼프에겐 너무 힘든 싸움으로 보인다.

<한국일보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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