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의 ‘반이민’ 브레인

반유대인 폭력에 시달리던 울프-라이브 글로서가 동유럽 벨라루스의 고향 마을에서 도망쳐 8달러를 들고 뉴욕 엘리스 아일랜드에 도착한 것은 1903년 1월이었다. 영어도 하지 못했지만 ‘지치고 가난한/자유를 숨쉬기 열망했던’ 그 외국인을 미국은 내치지 않고 받아들였다.

길거리 행상과 고된 공장노동으로 밤낮 없이 일했던 그는 3년 만에 아내와 자녀들을 데려올 수 있었다. 그들 가족이 정착한 펜실베이니아 존스타운에서 자녀들의 자녀들이 태어났고 길거리에서 시작했던 장사는 상점으로, 수퍼마켓 체인으로, 할인백화점으로 수천명 종업원을 거느린 가족기업으로 번성했다. 글로서 일가의 차세대들은 기업인·학자·의사·변호사 등으로 성공해 미 사회 각계각층으로 진출했다.

가난과 박해를 피해 찾아온 기회의 땅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이 ‘전형적 이민성공 스토리’는 현재 트럼프 백악관에서 초강경 반이민 정책을 설계하고 막후에서 집행 가속화를 지휘하고 있는 32세 선임고문 스티븐 밀러의 가족사다. 밀러는 자신이 폐지를 주창하는 바로 그 ‘가족 이민’의 산물인 셈이다.

은퇴한 신경심리학자인 밀러의 외삼촌 데이빗 글로서는 이번 주 초 폴리티코에 기고한 글에서 가족의 이민사를 밝히면서 조카의 반이민 행태를 통렬하게 질책했다. “가족의 이민 유래를 잘 알고 있는 조카가 우리 가족 삶의 근저를 부정하는 이민정책의 설계자가 되는 것을 난 경악과 점증하는 공포로 지켜보아 왔다”면서 그는 밀러의 고조부인 울프-라이브가 미국에 도착했던 당시에 현 밀러의 정책들이 시행되었더라면…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고 개탄했다.

실제로 글로서 일가가 미국에 도착하고 몇 년 후 ‘아메리카 퍼스트’ 국수주의자들의 공포와 편견으로 미국은 유대인 난민들에게 문을 걸어 닫았다. “만약 문이 닫힐 때까지 미국 이민을 지체했더라면…내 부모는 시체소각장의 연기로 사라졌을 것이며 나도, 스티븐의 어머니인 내 누이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스티븐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글로서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가족 이민 혜택으로 미국에 ‘존재’하게 된 그 스티븐이 요즘 이민사회를 공포와 불안으로 몰아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후의 무슬림 입국금지령부터 국경의 가족격리, 합법이민자들의 시민권 취득 제한에 이르기까지 모든 트럼프 이민 정책의 설계자이자 막후 지휘자인 밀러의 반이민 시각은 10대 때 이미 드러났다.

히스패닉 학생들에게 ‘영어만 사용’을 주장했던 산타모니카 고교시절과 다문화주의 및 포용 이민정책을 비판했던 듀크 대학시절부터 보수 선동가를 자처한 그가 본격적으로 반이민 투쟁에 뛰어든 것은 2009년 연방의회 반이민의 기수였던 제프 세션스 상원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면서였다.

극우 단체들과 연계해 2013년 연방의회 이민개혁안 통과 저지에 일익을 담당했고, 반이민 국수주의자인 스티브 배넌과 세션스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사라진 백인 유권자들’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2015년엔 군소후보에 불과했으나 ‘반이민 파워’를 감지했던 트럼프 캠페인의 이민 어젠다를 완성했고 2016년 1월 트럼프 캠페인에 합류했다.

‘합법이민 환영’을 전제로 한 이민정책을 내세운 주류 공화당에서 외면당했던 이들의 강경론은 트럼프 취임과 함께 속도와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정책설계의 사실상 브레인은 가족격리 정책이 논란을 부른 지난 6월까진 외부엔 거의 드러나지 조차 않았던 밀러였다.

온갖 스캔들과 권력암투로 백악관이 혼돈의 첫 해를 보내는 동안 트럼프 뒤의 ‘위대한 조종자’로 각광을 받은 스티브 배넌 수석전략가가 쫓겨나고, 러시아 특검수사에서 몸 사린 세션스 법무가 대통령의 눈 밖에 났지만 밀러만은 트럼프 최측근에서 주요정책에 관여하는 실세로 자리를 굳혀왔다.

몇 달 전 밀러는 행정부 내 관계부처 관리들과 미팅을 갖고 대통령 권한 행사로 이민에게 영향 줄 수 있도록 변화시킬 수 있는 규정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복지수혜 이민들의 시민권이나 영주권 취득을 막으려는 그의 합법이민 제한 플랜은 그때 나온 방법 중 하나로 알려졌다.

밀러의 플랜은, 이민변호사 라울 레이어스의 지적처럼 ‘교활하고 위험’하다. 합법적 집행을 강조하지만 입법목적을 왜곡 해석하여 이민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조장하는 노골적인 외국인 혐오증이 깔려있다.

“불법이든 합법이든 이민의 수를 제한해야 한다”는 별로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 밀러의 이민정책 목표다. 문제는, 법으로 보장된 합법이민자들의 공공복지 수혜를 시민권 거부의 빌미로 악용하고 함정단속을 벌여 결혼이민 인터뷰 장소에서 서류미비자들을 체포해가는 등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는 ‘밀러 백악관’의 반이민 정책이 도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가이다.

그의 심사(心思)를 이해는커녕 상상조차 하기 힘들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의 반이민 행태는 일시적 정치 전략이 아니다. 비틀어진 채 깊이 뿌리 내린 신념이다. 그가 백악관에 있는 한 반이민 정책은 계속 강화될 것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이민을 핫이슈 삼아 승리를 노리는 트럼프의 선거 전략이 바뀌지 않는 한 밀러는 건재할 것이다.

밀러의 외삼촌은 “이민의 후손으로, 자유로운 미국인으로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행사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호소했다. ‘이민의 나라’ 미국의 가치와 정의를 지켜낼 수 있는 후보에게 투표하자는, 우리가 새삼 다짐해야할 말이다.

글/한국일보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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