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어느 정신병원 의사는 입원한 중년 부인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그녀는 한쪽 손을 꽉 쥐고 있었는데 한사코 손을 펴 보이려 하지 않았다.

간호사들의 도움으로 강제로 그 여인의 손을 폈을 때, 그녀의 손에서 달그락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에 떨어진 것은 새파랗게 녹이 슨 1센트짜리 동전 한 닢이었다.

아마도 이 동전 한 닢은 퍽 오래전부터 그녀의 손 안에 쥐어져 있었던 것 같았다. 하잘것없는 동전 한 닢, 그것을 꽉 움켜쥐고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이 모습이 어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 이 곤고한 세상살이에서 어떻게 살아야 잃어버린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 한 묶음의 원론적 질문은 우리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부딪히는 과제이다. 이 답안의 소재를 두고 어떤 이는 매우 가까운 곳에 해답이 있다 하고, 어떤 사람은 절대자의 가르침에서 그 해답을 얻으려 한다.
좀 배웠다는 지식인은 우리들 모두에게 적용되는 정답은 없으며 각기의 생애를 모두 마감하기 전에는 정답에 이르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레 자포(自暴)하기도 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것은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종교에서는 설교나 설법의 제목이 되고, 철학에서는 관념과 경험을 논하는 화두가 될 것이며, 인문주의 문학에서는 휴머니즘 소설의 주제로 많이 사용되곤 했다.

톨스토이는 그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통해 사람은 외형적 물질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며, 그것이 인간을 창조한 신의 뜻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이라고 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은 사랑과 용서, 뉘우침과 관용, 이런 미학들이 성경적 복음이며, 신과 인간의 문제, 즉 고뇌, 불안, 죄악을 파헤치는 해답을 심리적 사상적으로 제시했기에 ‘인생의 복음서’가 되었다.

헤세도 수도원의 꽉 짜인 틀 속에서 절제된 교과서적 학문의 삶을 살아온 지성적 사람과, 바람 따라 구름 흐르듯 자유분방한 삶을 통해 얻은 감성적 사람을 비교하면서 두 사람 모두 참다운 인간 삶에 필요 충분 조건임을 그의 걸작 ‘지성과 사랑’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지성이 질문이라면 사랑은 해답이다.

요즘 들어 ‘이민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질문이 자주 떠 오른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나 미국 땅에 정착한 청교도 이민자들은 ‘기독교 신앙’이 그들 삶의 전부였다. 부(富)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을 밟은 백인 이민자들에겐 ‘거대한 농토와 그 수확’이 그들 삶의 가치였다.

노예로 팔려 온 아프리카인들은 ‘자유와 평등의 인간적 대우’를 받는 것이 그들의 꿈이었다. 이민의 문이 확대된 20세기에 건너온 이민자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것이 그들의 환상이며 목표였다. 불법 체류자들에겐 영주권이나 시민권(합법 신분증)을 취득하는 것이 급선적 목표일 것이다.

요즘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 정책은 많은 유색인종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주고 있다. 이민자는 그리 녹록지 않은 환경에 늘 약자라는 불안 속에 눈치로 삶을 이어간다. 의사소통도 자유롭지 못하고, 미국 사회의 시스템도 잘 모르고, 관광이나 여행 같은 문화생활은 엄두도 못 내고 그저 우직한 열정과 정직으로 여기까지 왔다.

어떤 면에선 돈보다 불안감을 떨치려고 더 열정적으로 일에만 집중했을 터이다. 그렇게 살면서 내 집도 장만하고 자식들 공부도 시켰는데, 어느덧 나그네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살았는가? 이 질문에, 꽉 움켜쥐고 살았던 손을 이제는 펴서 보여주자. 당당하게!

글/이보영 LA 민주평통 자문위원

<그늘집>
www.shadedcommunity.com
gunulzip@gmail.com
미국 (213) 387-4800
한국 (050) 4510-1004
카카오톡 iminU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