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비상사태’의 운명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미국은 진짜 ‘비상사태’에 직면했었다. 철강노조가 대규모 파업을 위협하면서 무기 생산에 필요한 철강 공급에 차질을 빚게 된 것이다.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파업을 막기 위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철강회사 국유화를 지시하는 명령을 내렸다.

철강업계는 대통령의 국유화 명령은 의회의 고유 권한인 입법권 행사로 권력분립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며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트루먼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군 통수권자로서의 권한을 주장했으나 연방대법원은 민간회사 국유화 명령은 성격상 입법에 해당하고 입법은 의회의 고유 권한이라면서 위헌판결을 내렸다. 비상사태 선포는 무효화되었다.

사상 최장기간의 연방정부 셧다운을 초래하며 국정혼란을 빚었던 ‘트럼프의 장벽’이 새해 국정의 발목을 잡으며 다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합리적 시각으로 보면 전혀 비상사태가 아닌’ 상황에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것이다.

또 한 차례 셧다운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마지못해 서명한 초당적 예산안에서 원하는 만큼 얻어내지 못한 국경장벽 건설 경비를 의회를 거치지 않고 국방예산 등에서 전용하기 위해서다. 그건 세금 수십억 달러를 장벽 짓는데 쓰지 않겠다는 연방의회의 결정을 뒤집겠다는 의미다.

반대투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고, 민주당은 의회의 비상사태 종결 촉구 결의안 마련에 착수했으며 소송이 줄을 잇고 있다. 15일 비상사태 선포 몇 시간 만에 땅을 강제수용 당하게 된 텍사스 접경지역 토지 소유주들을 대리한 시민단체의 소송이 워싱턴 연방지법에 접수되었고, 대통령의 날인 18일엔 캘리포니아 등 16개주가 샌프란시스코 연방지법에 집단 위헌소송을 제기했으며 하루 뒤엔 민권단체 ACLU도 소송대열에 합류했다.

법정투쟁은 트럼프도 예견했는지 15일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비상사태 향후 전망을 가락에 맞춰가며 읊어 댔다 : “우린 비상사태를 선포할 것이다, 그러면 소송을 당할 것이고, 이어서 제9항소법원으로 갈 것이고, 거기서 나쁜 판결을 받을 것이고…결국 대법원으로 갈 것이다. 희망컨대 거기서 공정한 판결을 받기를. 그리고 우리는 대법원에서 이길 것이다”

미 건국의 아버지들은 대통령의 강력한 권한을 선호하지 않았고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의 단독권한은 사실상 많지 않다. 트루먼의 국유화 명령을 위헌으로 판정한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대통령의 입법관련 권한에 대해 “헌법은 입법절차에서의 그의 기능을, 옳다고 생각하는 법을 추천하고 그르다고 생각하는 법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제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 대통령의 권한은 의회와 법원에 의해 차츰 강화되었고 그 대표적인 것이 1976년의 국가비상사태법이다. 닉슨의 워터게이트 이후, 대통령의 포괄적 재량권에 속해 있는 국가비상사태 선포 권한을 제한하기 위한 의도였지만 한편 대통령의 선포 권한을 성문화한 법이기도 했다.

트루먼에겐 없었으나 트럼프에겐 있는, 국가비상사태법은 비상사태 선포의 ‘합법’ 근거이자, 일부 법학자들이 트럼프의 조치를 비판하면서도 그의 승소를 예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법은 대통령이 최대한 절제하며 ‘진짜’ 비상사태에만 선포 권한을 사용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 통과되었을 것이다. 지난 43년 간 58차례나 선포되었지만 별 논란도, 위헌소송도 없었다. 자신의 핵심지지층을 회유하는 선거공약 이행을 위해, 의회가 자신이 원하는 기금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합리적이며 불필요한’ 비상사태 선포를 강행한 대통령은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양극화 정치 현실에선, 궁극적으로 상하원 3분의2 찬성이 필요할 비상사태 종결 결의안 통과가 거의 불가능하니 트럼프 비상사태의 ‘운명’은 연방대법원에서 최종 결정될 것이다. 위헌소송들이 제기된 진보성향의 연방지법과 항소법원에선 트럼프의 패소가 거의 확실시 되지만 5대4로 보수성향 강력한 대법원은 다르다.

지난해 중간선거 몇 달 전 이슬람 국민 입국금지령 위헌소송에서 대통령의 손을 들어주었던 대법원이 이번에도 2020년 대선 전 트럼프에 승소판결을 안겨줄 가능성이 크다고 아지즈 허크 시카고법대 교수는 진단한다. 그러나 진보건 보수건 어떤 대법관도 양심상 견제와 균형의 권력분립체제를 명시한 미 헌법이 “이 대통령의 국가비상사태 선포라는 책략 사용”을 허용한다고 믿지는 못할 것이라고 로드니 스몰라 델러웨이 법대 교수는 대법원의 무효화 판결을 강력히 기대했다.

“국가비상사태법 하의 ‘비상사태’는 실재하는가? 그렇다 해도 그 상황이 이 법의 예산전용 조항에 명시된 필수적 군사 사안인가”에 대한 해석이 판결의 근거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고, 행정부의 권한을 존중해온 사법부의 전통이 얼마나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달려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앞으로 소송이 잇달을 것은 확실한데 승패의 법적 근거는 아직 확실치 않다.

제시카 레빈슨 로욜라법대 교수는 법정투쟁의 전망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 트럼프 대통령의 국가비상사태 선포는 합법적인가? 물론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나? 그래선 안 된다. 아마도 못 얻을 것이다.

위기 아닌 위기를, 비상사태 아닌 비상사태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대통령에 피로감이 쌓일수록 지난 18일 미 전국 곳곳의 시위현장에 등장했던 피켓의 구호에 새삼 공감하게 된다 – “트럼프가 비상사태다!(Trump Is The Emergency!)”

<한국일보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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